란드슈테인 성

란드슈테인 성

성의 영주들에게 막대한 부를 선사했던 무역로

란드슈테인 캐슬은 보헤미아의 가장 남쪽 끝 때묻지 않은 체코 캐나다 숲 지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보존된 기념비적인 요새로 현재는 폐허로 남아있지만 방어 목적에 충실했던 기념비적인 건축물로서 여전히 많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란드슈테인 성의 역사

란드슈테인 성의 역사는 블라디슬라프라고 불렸던 모라비아의 후작이 세상을 떠나고 보헤미아의 왕 프르제미실 오타카르(Přemysl Otakar II)가 지역의 행정을 담당한 1222년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소유권 분쟁이 있는 영토의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여러 개의 성을 지었습니다. 특히 거대한 란드슈테인 성의 건설은 영주에게 큰 부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무역로와 체코 땅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3세기 중반 이후 란드슈테인 캐슬은 비트코프치(Vítkovci) 가문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붉은 방패에 은색 장미를 가문의 문양으로 갖고 있던 비토코프치 가문의 후예 중 하나는 ‘란드슈테인’ 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란드슈테인의 영주로서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란드슈테인의 빌렘(Vilém)의 통치 기간 동안 가문은 남부 보헤미아의 영토와 여러 캐슬들을 관리했습니다. 

야심 찼던 란드슈테인의 빌렘은 다른 강력한 가문을 돕고 정착시켜야 했던 룩셈부르크의 왕 얀과 그의 삼촌이었던 로즘베르크의 페트르와는 정치적인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빌렘과 삼촌 페트르는 왕에게 협력해 평화를 이뤘고, 왕으로부터 많은 특권을 얻었으며,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왕 얀의 아들이었던 카를 4세는 빌렘의 지원에 고마워했고 그에게 다양한 외교 임무를 주었습니다. 마침내 1351년, 왕은 빌렘을 프라하 성의 사령관이라는 권위 있는 직책에 임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란드슈테인 성의 바로 아래에 있는 오래된 무역로는 비트코프치 가문에게 큰 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 초부터 란드슈테인의 영주는 그들의 친척과 이웃인 흐라데츠 (Hradec)의 영주들과의 분쟁에 휘말렸습니다. 이에 결국 14세기 중반, 빌렘과 흐라데츠의 인드르지흐간의 적대감은 정점을 찍었고, 결국 결투로 이어졌습니다. 카를 4세가 이를 중재하려 했지만 결국 빌렘은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 중 하나였던 그는 1356년 4월 란드슈테인에서 사망했고 그의 죽음으로 란드슈테인 가문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란드슈테인 성의 전설

전설 1

란드슈테인 캐슬의 가장 유명한 전설은 빌렘과 인드르지흐의 경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빌렘의 딸 마르케타(Markéta)는 흐라데츠의 인드르지흐와 사랑에 빠졌고 빌렘은 그녀가 그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드르지흐는 무역로가 란드슈테인을 지나게 하지 않기  위해 무역 경로를 변경했고, 서로 간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며 빌렘은 그의 라이벌인 흐라데츠의 인드르지흐에게 화가 났습니다. 이에 그의 딸이 인드르지흐를 영원히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마르케타는 그녀의 연인을 보기 위해 비밀리에 성을 탈출하려고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빌렘이 계획을 발견했고 딸을 성벽에 가뒀습니다. 이후, 마르케타의 귀신은 밝은 밤에 성에 나타나고 빌렘의 유령은 용서를 구하기 위해 폭풍우가 내리는 날에 성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전설 2 

성이자 요새인 란드슈테인 성은 13세기부터 귀족 가문인 비트코프치와 영주 빌렘이 거주했던 곳이었습니다. 어느 날, 영주는 숲속 깊은 곳까지 말을 타고 갔다가 날이 밝을 때까지도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은 데다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던 그는 근처 마을의 어느 재단사의 집에 들러 음식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재단사는 그의 가족과 아이들이 먹을 음식마저 충분치 않았기에 이를 거절했고, 영주는 매우 분노하여 군인을 보내 재단사를 체포한 후 다음날 처형했습니다. 그 후, 악마가 빌렘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빌렘은 더 이상 평화를 찾지 못하도록 악마에게 선고받았다고 전해집니다.